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릴 열도 분쟁 (문단 편집) == 일본의 주장 == [[일본]]은 북방 4개 섬이 앞서 설명한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언급된 쿠릴 열도에 포함되지 않는,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라고 주장한다. 일본 정부에 따르면 이 4개 섬은 이미 [[에도 시대]]부터 일본의 고유 영토였으며 근대 제국주의와 무관하다. [[에도 막부]] 3대 쇼군 [[도쿠가와 이에미츠]] 대인 1644년에 막부가 제작한 [[https://ja.m.wikipedia.org/wiki/%E6%AD%A3%E4%BF%9D%E5%9B%BD%E7%B5%B5%E5%9B%B3|정보국회도]](正保国絵図)에 구나시리와 에토로후 등이 등장함으로써 일본의 영향권에 포함되었고,[* 이 지도에 북방영토 도서인 구나시리와 에토로후가 묘사되었다. 다만 이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일본의 본토였던 혼슈, 규슈, 시코쿠 등의 묘사는 상당히 정확하나 일본의 힘을 잘 닿지 못했던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의 묘사는 엉망진창이다. 이 지도는 오히려 당시 일본의 북방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미약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.] 이후에도 1754년 [[마츠마에 번]]의 구나시리 장소 건설,[*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앗케시 장소(현 앗케시정)를 통해 북방 도서군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러시아에 대한 방비책으로 쿠릴 열도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1754년 구나시리 섬에 장소를 직접 설치하였다.] 1789년 [[쿠나시르 메나시 전투|메나시 구나시리 전투]] 진압 등을 계기로 자연스레 일본의 영토에 접어들었다. 또한 11대 쇼군 [[도쿠가와 이에나리]] 대인 1799년 에도 막부가 동에조치를 막부 직할령으로 전환함에 따라 법적으로 일본에 완전히 귀속되었다. 특히 1811년 발생한 골로브닌 사건은 에도 막부의 이 지역에 대한 실효지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. 그리고 외교적으로도 이 4개 섬에 대한 일본의 관할권은 부정된 적이 없었다. 에도 막부와 러시아가 국교를 수립한 시모다 조약(1855)에서도 에토로후 이남의 4개 섬은 일본령으로 인정받았고 1875년과 1905년의 국경 변화 과정에서도 이 4개 섬은 줄곧 일본령으로 남았다. 즉,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2차 대전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이 4개 섬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일본 측 논리의 핵심이다. 이러한 관점에서 [[혼슈]], [[홋카이도]], [[규슈]], [[시코쿠]]의 4개 본도(本島)와 그 이외 작은 섬들을 일본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골자의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명시한 "이외 작은 섬"은 북방 4개 섬 역시 포함하며 '일본이 폭력과 사욕으로 손에 넣은 모든 영토로부터 추방한다'는 1943년 카이로 선언 내용은 [[에도 시대]]부터 일본 고유의 영토였던 북방영토에 적용되지 않는다. 즉, 북방 도서는 연합국이 일본령에서 제외할 것을 공언한 19~20세기 침략전쟁의 산물이 아니라 아직 전근대였던 17~18세기에 일본이 평화적으로 귀속한 고유 영토이며 이는 19세기 일본의 국제외교 데뷔 이후에도 자연스레 인정받은 주권이기에 러시아에 귀속될 이유가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